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습니다. 아직 한 시간이 넘게 남았고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봤는데 끝까지 봐야지.’
비슷한 일은 생활 속에서 꽤 자주 생깁니다. 큰맘 먹고 산 물건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정리하지 못하기도 하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서비스를 이미 몇 달 이용했다는 이유로 계속 사용하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다른 곳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으면서도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도 합니다.
이미 사용한 돈이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앞으로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경제학과 심리학에서는 이미 지출해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매몰비용(sunk co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비용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선택까지 영향을 받는 경향을 흔히 매몰비용 효과(sunk cost effect)라고 부릅니다.

이미 써버린 비용이 왜 다음 선택에 영향을 줄까?
매몰비용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이라는 점입니다.
영화표를 15,000원에 구입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화를 30분 정도 봤는데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이때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영화를 계속 보거나, 영화관을 나와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이미 지불한 영화표 가격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다고 해서 15,000원의 가치가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나온다고 해서 추가로 15,000원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시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오히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 나에게 더 나은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실제 선택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돈 주고 들어왔는데 아깝잖아.’
이 생각이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지나간 비용이 앞으로 사용할 시간에 대한 결정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여기서 비용은 꼭 돈일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이나 노력 역시 매몰비용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몇 시간을 들여 조립하던 물건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여기까지 했는데’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 만들 수 있고, 오랫동안 사용해온 서비스가 지금은 불편해졌어도 그동안 익숙해지는 데 들인 시간이 아까워 바꾸기를 미룰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은 생각보다 강하다
매몰비용 효과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연구가 심리학자 할 아크스(Hal Arkes)와 캐서린 블루머(Catherine Blumer)의 연구입니다.
이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이미 지불한 비용 때문에 이후의 선택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을 살펴봤습니다.
대표적인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서로 겹치는 여행 상품을 이미 구매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더 비싸지만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이고, 다른 하나는 더 저렴하지만 더 즐거울 것으로 예상되는 여행이었습니다.
두 여행을 모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여행을 선택할지 물었을 때, 일부 참가자들은 더 많은 돈을 지불한 여행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미 더 큰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이 앞으로 어떤 경험을 선택할지에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도 비슷합니다.
비싸게 산 옷이 막상 입어보니 불편합니다. 옷장에는 더 편하고 자주 입는 옷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싼 옷을 버리거나 정리하려고 하면 유난히 아깝게 느껴집니다.
‘이거 얼마 주고 샀는데.’
그 가격은 이미 지불한 돈입니다. 지금 옷을 보관한다고 다시 돌아오는 돈은 아닙니다. 그런데 과거에 지불한 금액이 현재의 보관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때로는 물건 자체보다 그 물건에 들어간 과거의 비용을 붙잡고 있는 셈입니다.
시간과 노력도 아까워서 놓지 못할 수 있다
저는 매몰비용이라고 하면 처음에는 돈부터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상에서는 돈보다 시간이 더 아깝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책을 절반 넘게 읽었는데 계속 재미가 없습니다. 다른 읽고 싶은 책은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으려고 하면 ‘그래도 반이나 읽었는데 조금만 더 읽자’는 생각이 듭니다.
줄을 서는 상황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10분 정도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줄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면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30분이나 기다렸는데 지금 가면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다시 10분을 기다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미 기다린 30분은 줄을 떠나더라도, 계속 기다리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판단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인데, 우리는 이미 기다린 시간을 함께 계산해버리기 쉽습니다.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이만큼 노력했는데 어떻게 그만둬’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래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꾸준함이 필요한 일도 있고, 어려운 시기를 조금 더 견디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는 이유가 앞으로 얻을 가치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들인 것이 아까워서인지 구분해보는 것입니다.
매몰비용을 알면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하게 될까?
매몰비용 효과를 알게 되면 반대로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그만두는 게 합리적인 걸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을 계속할지 결정할 때는 앞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 추가로 필요한 시간과 비용, 목표의 중요성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힘들다고 그만두는 것과, 몇 년 동안 이용하지 않은 서비스를 단순히 오래 가입했다는 이유로 계속 결제하는 것은 같은 문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매몰비용을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를 무조건 무시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은 앞으로의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들인 노력으로 실력이 늘었거나, 앞으로 조금만 더 투자하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면 그 사실 역시 판단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비용 그 자체가 앞으로 계속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꿔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미 얼마를 썼지?’보다
‘지금 처음 선택하는 상황이어도 나는 이것을 선택할까?’
‘여기까지 얼마나 오래 했는데’보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가?’
이렇게 생각하면 과거에 사용한 비용과 앞으로의 선택을 조금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기울인 것에 자연스럽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그만두는 순간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비용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과, 그 경험 전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동안의 경험에서 배운 것은 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하나의 정보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무언가를 계속할지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했는데 아까워서…’라는 생각이 든다면 한 번쯤 질문해볼 만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앞으로 얻을 가치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간 비용에 대한 아쉬움일까?
그 둘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선택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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