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새로 샀을 때 설정을 하나씩 전부 바꾸는 편인가요?
저는 꼭 필요한 것만 몇 개 바꾸고 나머지는 그냥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림 설정도 그렇고 앱의 화면 설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나중에 바꿔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사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그대로 몇 달을 쓰기도 합니다.
온라인에서 어떤 서비스를 신청할 때도 비슷합니다.
선택지가 여러 개 있는데 하나가 이미 체크되어 있으면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직접 고른 것은 아닌데 어느새 제 선택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선택되어 있는 것을 이렇게 쉽게 유지할까요?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에서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미리 정해져 있는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흔히 기본값 효과(default effect)라고 설명합니다.
기본값은 우리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때 적용되는 선택입니다.
생각해보면 일상 곳곳에 기본값이 있습니다.
휴대폰의 초기 설정도 기본값이고, 프로그램을 처음 설치했을 때 정해져 있는 옵션도 기본값입니다. 어떤 신청서에서 이미 선택되어 있는 항목도 기본값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 설정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처음 상태’가 생각보다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바꾸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기본값 효과를 처음 알았을 때 저는 조금 이상했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싶었거든요.
물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바꾸려면 아주 작게라도 행동이 필요합니다.
설정 화면에 들어가야 하고, 여러 선택지를 확인해야 하고, 지금 상태보다 다른 선택이 더 나은지 판단해야 합니다.
반대로 기본값을 유지하는 데는 별다른 행동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넘어가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앱을 설치했는데 알림이 켜진 상태가 기본값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알림을 받고 싶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대로 알림을 받고 싶지 않다면 설정을 찾아서 직접 꺼야 합니다.
몇 초면 끝나는 일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나중에 하지 뭐.’
하고 넘어가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귀찮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설정된 선택은 단순히 첫 화면에 놓여 있는 옵션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유지되는 선택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그냥 두는 것이 편해질 때가 있다
어떤 서비스를 처음 설정하는데 선택해야 할 항목이 하나뿐이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런데 설정할 것이 열 개, 스무 개로 늘어난다면 어떨까요?
처음 몇 개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뒤로 갈수록,
‘이건 그냥 기본으로 해도 되겠지.’
하고 넘어가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조금씩 생각할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좋은지 비교해야 하고, 잘 모르는 기능이라면 설명도 읽어봐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기본값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4호에서 다뤘던 선택 과부하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선택 과부하는 선택지가 너무 많을 때 결정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둡니다.
기본값 효과는 그 상황에서든 단순한 상황에서든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지가 있을 때 그것을 유지하는 경향에 더 가깝습니다.
다만 현실에서는 두 현상이 함께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하나씩 비교하기 귀찮아지고, 결국 미리 선택되어 있는 옵션을 그대로 사용하는 식입니다.
기본값을 ‘추천’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본값을 유지하는 이유가 귀찮음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서비스에서 한 가지 옵션이 미리 선택되어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쓰는 설정인가?’
‘이걸 기본으로 해놓은 이유가 있겠지.’
직접 ‘추천합니다’라고 쓰여 있지 않아도 처음 설정된 상태 자체를 일종의 추천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이런 느낌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처음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설정 항목이 열 개 있는데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개발자가 처음 정해놓은
값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판단이 꼭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기본 설정이 대부분의 사용자에게 무난하도록 만들어진 경우도 많으니까요.
문제는 기본값이라는 사실과 나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는 사실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에게 편한 설정이 나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고, 서비스 제공자에게 유리한 기본값과 사용자에게 유리한 선택이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나 개인정보처럼 중요한 선택에서는 ‘원래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만으로 넘어가지 않고 한 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값 하나가 실제 선택을 크게 바꿀 수도 있다
기본값 효과와 관련해서는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와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등이 ‘넛지(nudge)’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기본값의 중요성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넛지는 사람에게 특정 선택을 강제로 시키기보다 선택하는 환경을 설계해 행동에 영향을 주는 방식을 말합니다.
기본값은 그중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제도에 참여하려면 직접 신청해야 하는 방식과, 처음부터 참여 상태로 두되 원하지 않는 사람은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방식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두 경우 모두 최종적으로 참여할지 말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발점은 다릅니다.
첫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게 되고, 두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참여하게 됩니다.
즉, 선택할 자유는 그대로인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때 도착하는 곳이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퇴직연금 가입이나 장기 저축처럼 여러 분야에서 기본값 설정이 참여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처음 설정된 작은 차이가 생각보다 큰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다고 기본값을 유지하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다
기본값 효과를 알고 나면 모든 기본 설정을 의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본값은 꽤 유용합니다.
휴대폰을 새로 살 때마다 화면 밝기부터 글자 크기, 소리, 네트워크, 앱 권한까지 수십 가지 설정을 전부 처음부터 결정해야 한다면 그것도 상당히 피곤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미리 만들어두면 사용자는 꼭 필요한 부분만 바꾸면 됩니다.
매번 모든 것을 직접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분명 편리합니다.
저도 새로운 앱을 설치할 때 설정을 전부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그냥 기본으로 써도 되겠다.’
싶은 것은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편합니다.
결국 기본값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 선택이 중요할 때도 별생각 없이 넘어가는 것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이 나가거나 정보가 제공되는 설정은 한 번 더 보기
기본값을 전부 확인하려고 하면 오히려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값 효과를 알아본 뒤 모든 설정을 하나씩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항목만 한 번 더 확인하는 편이 현실적이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결제 여부, 정기 구독, 개인정보 공개 범위, 알림 수신, 추가 옵션처럼 나중에 돈이나 개인정보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항목이 이미 선택되어 있다면,
‘내가 이걸 선택했나?’
하고 한 번 보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그대로 두면 되고, 원하지 않는다면 바꾸면 됩니다.
핵심은 기본값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선택까지 자동으로 결정되지는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선택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생각보다 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중에는 오래 고민해서 결정하는 것도 있지만 몇 초 만에 넘어가는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몇 초 만에 결정하는 것들 가운데는 사실 내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고른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어 있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것도 있을 겁니다.
저는 기본값 효과를 찾아보면서 휴대폰 설정부터 떠올랐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능 중에서도 제가 직접 선택한 줄 알았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어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 꽤 있을 것 같더라고요.
물론 그것이 마음에 든다면 굳이 바꿀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하나가 이미 체크되어 있다면 한 번 정도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처음부터 선택되어 있지 않았어도 나는 이걸 골랐을까?’
답이 ‘그래도 골랐을 것 같다’라면 그대로 두면 됩니다.
그런데 잠깐 망설여진다면 그때가 다른 선택지를 한 번 살펴볼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설정된 선택은 편리합니다.
매번 모든 것을 처음부터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편리한 출발점과 나에게 가장 좋은 도착점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본값 효과를 알아두는 것만으로도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이미 체크된 선택’을 한 번쯤 다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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