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꽤 즐겁게 놀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마지막에 있었던 안 좋은 일만 계속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많이 하고, 사진도 찍고 분명 즐거운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기 직전에 아이가 짜증을 냈다거나, 주차장에서 한참 기다렸다거나, 마지막에 누군가와 기분 상하는 일
이 생기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괜히 나왔나.’
생각해보면 조금 억울합니다.
즐거웠던 시간은 몇 시간이고 마지막에 기분이 상했던 건 10분 정도였는데, 집에 돌아와서 오늘 하루를 평가하려고 하면 그 10분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거든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여행 중간에 힘든 일이 조금 있었어도 마지막 날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그래도 이번 여행 좋았다.’라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기억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비슷한 비중으로 기억하는 걸까요?
아니면 유독 크게 남는 순간이 따로 있는 걸까요?
이와 관련해서 알아보다가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습니다.
피크엔드 법칙은 어떤 경험을 나중에 평가할 때 그 경험의 모든 순간을 평균 내듯 기억하기보다 감정이 가장 강했던 순간인
‘피크(Peak)’와 경험이 끝나는 ‘마지막(End)’이 전체 평가에 비교적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만 들으면 조금 어려워 보이는데 제가 처음 떠올린 건 역시 여행이나 나들이였습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기억도 좋다”는 말을 그냥 기분상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의 기억과 평가 방식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험했던 모든 순간을 똑같이 기억하지 않는다
하루를 시간순으로 떠올려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한 일, 차를 타고 이동한 시간, 밥을 먹은 일, 대화를 나눈 일, 잠깐 기다렸던 시간까지 전부 합치면 수
십 가지가 넘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누군가가,
“오늘 어땠어?”
라고 물어보면 그 모든 장면을 하나씩 떠올린 뒤 평균을 계산해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몇 가지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정말 재미있었던 순간이나 크게 웃었던 일, 반대로 화가 많이 났던 순간처럼 감정이 강했던 장면이 먼저 생각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마지막에 있었던 일도 전체적인 느낌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시간 동안 나들이를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4시간 50분 동안은 별문제 없이 즐겁게 지냈는데 마지막 10분 동안 주차장에서 서로 짜증을 냈습니다.
시간만 놓고 보면 즐거웠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깁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아까 싸웠던 일이 계속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즐거웠지?”
라는 질문에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경험의 길이와 기억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반드시 똑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피크’라고 해서 꼭 좋은 순간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피크엔드 법칙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 저는 피크가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피크는 단순히 ‘최고로 좋았던 순간’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가장 강했던 순간에 가깝습니다.
정말 행복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놀이공원에 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고 날씨도 더웠지만 정말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를 탔을 때 너무 재미있었다면 그 장면이 강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루 종일 무난하게 잘 놀았는데 마지막에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건이 가장 강한 감정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그날을 떠올렸을 때는 몇 시간 동안 있었던 평범한 순간보다 이런 장면들이 훨씬 쉽게 떠오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진첩도 조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사진을 보면 이동하면서 지루했던 시간이나 별일 없이 걸어 다녔던 시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좋았던 장소나 재미있었던 순간처럼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주로 남습니다.
물론 실제 기억은 사진첩처럼 단순하지 않지만, 모든 순간이 똑같은 크기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마지막 순간도 중요하게 남을까?
피크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엔드(End), 즉 마지막 순간입니다.
경험이 끝날 때의 느낌이 전체 경험을 평가할 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알고 나니 식당이나 여행에서 마지막 경험이 왜 은근히 중요한지도 이해가 됐습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는데 계산 과정에서 기분이 상했다면 그 식당을 떠올릴 때 마지막 장면이 같이 생각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간에 조금 기다렸더라도 마지막에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줬다면 전체 경험을 비교적 좋게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와 하루를 보내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잘 지냈는데 잠들기 직전에 숙제나 양치 때문에 크게 싸우면 그날 하루가 온통 싸움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루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 같이 밥도 먹었고 웃었던 시간도 있었고 별문제 없이 지냈던 시간이 훨씬 길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그 앞의 시간까지 덮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물론 마지막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항상 하루 전체를 나쁘게 기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경험의 종류나 개인의 감정, 다른 사건들에 따라 기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피크엔드 법칙 역시 모든 기억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공식이라기보다는 경험을 평가할 때 특정 순간이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경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피크엔드 법칙은 어떤 연구에서 알려졌을까?
피크엔드 법칙과 관련해서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동료들의 연구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자주 소개되는 것이 불편한 경험의 지속 시간과 기억에 관한 연구입니다.
참가자들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는 불편한 경험을 했는데, 한 조건에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
고 다른 조건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 손을 담그되 마지막에는 물의 온도가 아주 조금 올라가 불편함이 다소 줄어들도록 했습
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번째 경험이 전체적으로는 더 길었다는 것입니다.
불편한 시간을 단순히 합치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참가자들은 나중에 다시 경험해야 한다면 더 오래 지속됐지만 마지막 불편함이 조금 줄어든 경험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전체 시간만 생각하면 조금 이상합니다.
‘힘든 시간이 더 긴데 왜 그쪽을 고르지?’싶으니까요.
하지만 경험을 나중에 기억할 때 단순히 ‘몇 분 동안 힘들었는지’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느껴졌던 순간과 마지막의 느낌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오래 힘들었다고 반드시 더 나쁘게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지속 시간 무시(duration neglect)도 자주 언급됩니다.
경험을 평가할 때 실제로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시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30분 기다리는 것과 5시간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똑같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나중에 경험을 떠올릴 때는 실제 지속 시간 외에도 감정의 강도와 마지막 순간 등이 함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저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좋은 시간이 길면 당연히 좋은 기억으로 남겠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꼭 시간의 양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아주 짧은 여행이어도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는 경우가 있고, 며칠 동안 여행을 했어도 별다른 장면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만 좋게 만들면 모든 경험이 좋아질까?
피크엔드 법칙을 처음 접하면 이런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럼 중간은 대충 하고 마지막만 좋게 하면 되는 건가?’
당연히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이 계속 맛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직원이 웃으며 인사했다고 해서 갑자기 최고의 식당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겁니다.
여행 내내 힘들었는데 마지막 5분이 좋았다고 모든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피크와 엔드가 전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 나머지 경험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 개념을 ‘마지막만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용하는 것보다 좋았던 경험 하나가 마지막의 작은 사건 때문에
전부 나빴던 것처럼 느껴질 때 다시 한번 돌아보는 데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마지막에는 좀 힘들었지만 정말 하루 종일 별로였나?”하고 말입니다.
하루가 엉망이었다고 느껴질 때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보기
가끔 하루를 마치면서,
‘오늘 진짜 별로였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별로였는지 생각해보면 저녁에 있었던 일 하나가 너무 크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떠올려보면 느낌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고, 해야 할 일도 하나 끝냈고, 중간에 웃었던 일도 있었는데 마지막에 화가 난 일이 가장 선명해서 하루 전체를 그렇게 평가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하루 중 정말 좋았던 순간 하나가 있었다면 그것을 일부러 다시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걸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라기보다 마지막 장면 하나가 하루 전체를 대표하지 않도록 다른 장면도 같이 보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고, 중간에 좋았던 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둘 중 하나를 없던 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하루를 만들기보다 좋은 마무리를 하나 더 만들어보기
피크엔드 법칙을 찾아보다가 저는 오히려 거창한 계획보다 작은 마무리가 생각났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무리해서 일정을 하나 더 넣는 것보다 여유 있게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돌아오는 것.
아이와 하루 종일 여러 활동을 하는 것보다 자기 전에 오늘 재미있었던 일을 하나 이야기하는 것.
힘든 일을 끝낸 뒤 바로 다음 일을 시작하기보다 잠깐 쉬면서 ‘그래도 오늘 이건 끝냈다’고 생각해보는 것.
이런 작은 마무리가 하루 전체를 완전히 바꿔놓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경험을 끝냈는지가 나중에 그 일을 떠올릴 때 하나의 단서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특히 하루 끝에 일이 꼬이면 그전까지 괜찮았던 시간도 같이 잊어버리는 편이라 이 부분이 조금 찔렸습니다.
‘오늘 하루 망했다.’
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따져보면 하루가 망한 게 아니라 마지막 20분이 힘들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마지막 장면이 하루 전체는 아니다
피크엔드 법칙을 알아보고 나니 기억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몇 시간짜리 경험을 그대로 저장해두었다가 다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중 어떤 장면은 크게 남고 어떤 장면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정이 강했던 순간이나 마지막에 있었던 일이 전체 경험을 평가하는 데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즐겁게 보낸 하루의 마지막에 작은 일이 꼬였을 때는 저도 바로,
‘오늘 괜히 나왔네.’라고 결론부터 내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한 번쯤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이 별로였던 걸까, 정말 오늘 하루 전체가 별로였던 걸까?’
반대로 좋은 경험을 만들고 싶을 때는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마지막에 기분 좋게 끝낼 작은 방법을 하
나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하루는 그날 있었던 모든 순간을 똑같이 모아놓은 결과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마지막에 기분이 조금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전에 있었던 좋은 시간까지 함께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순간 하나가 내가 보낸 하루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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