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은 순간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들 이해했나?’
‘나만 모르는 건가?’
결국 질문하고 싶었던 마음을 접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설명이 끝난 뒤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니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그 순간 조금 허무해집니다.
나만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옆 사람도, 그 옆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생깁니다.
회의에서 누군가의 의견에 의문이 들지만 다른 사람들이 별말을 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분위기가 불편한데 모두 태연해 보여서 내가 예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주변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조용한 모습을 보고,
‘다들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러 사람이 실제로는 비슷한 의문이나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며 집단 전체의
생각을 잘못 추측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조금 어렵게 느껴지지만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서로 잘못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은 보이지 않고 행동만 보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내 생각과 감정은 내가 직접 알고 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내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상황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머릿속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표정이나 말, 행동 정도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겉모습이 항상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괜히 질문하기 민망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다.
회의에서 의견이 달라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 주변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 모습이,
‘저 사람은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라는 정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의실에서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한 학생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으니 자신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 학생 역시 같은 이유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앞쪽에 앉은 학생도 주변이 조용하니,
‘다들 이해했는데 나만 모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뭅니다.
결과적으로 강의실은 아주 조용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모두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같은 부분에서 막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속마음과 다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비교하면 오해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불안함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불안함은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 역시 자신의 불안함은 알지만 내 속마음은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나만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특별히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집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먼저 표현하지 않는 것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잘못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방관자 효과나 동조 현상과는 무엇이 다를까?
다원적 무지를 보면 이전에 알아본 방관자 효과가 떠오릅니다.
13호에서 살펴본 방관자 효과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도움 행동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질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 과정에는 책임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 느껴지는 책임 분산을 비롯해 여러 요인이 관련될 수 있습니다.
또 애매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상황을 판단하는 과정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태연하게 있다면,
‘별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면 서로의 침착한 모습을 근거로 상황을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원적 무지가 방관자 효과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개념의 범위는 같지 않습니다.
방관자 효과는 주변 사람의 존재와 도움 행동의 관계가 중심입니다.
반면 다원적 무지는 도움 상황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수업, 회의, 직장, 친구 관계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개인이 실제로 가진 생각과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추측한 집단의 생각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19호에서 알아본 동조 현상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동조는 집단의 의견이나 행동에 맞춰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바꾸는 현상을 말합니다.
다원적 무지에서는 한 단계 앞의 오해에 조금 더 초점을 둘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집단의 대다수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집단의 생각을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추측이 이후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면 동조와 연결되는 모습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실제 생활에서는 여러 심리 현상이 칼로 자른 것처럼 완전히 따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원적 무지를 이해할 때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을 놓친 것은 아닐까?’
라는 부분을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 사람이 먼저 말하면 생각보다 분위기가 쉽게 달라질 수도 있다
다원적 무지가 재미있는 이유는 누군가 한 사람만 자신의 실제 생각을 표현해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까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두가 조용히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죄송한데 이 부분을 한 번만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저도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는 모두가 이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질문 하나가 나오자 실제 분위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생각해보면 꽤 많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을 누군가 먼저 질문했을 때 속으로,
‘아, 나만 궁금했던 게 아니었구나.’하고 안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제가 먼저 질문했더니 다른 사람이,
“나도 그거 궁금했는데.”라고 말했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동의한다거나 모두가 이해했다는 결론을 바로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매번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굳이 의견을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질문이나 의견을 접고 있다면 한 번 정도는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도 이 부분이 헷갈리나요?”처럼 아주 가볍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직접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가까운 사람 한 명에게 먼저 물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게 확인했는데 정말 나만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이 조용하다는 사실과 주변 사람들이 실제로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은 볼 수 있지만 속마음까지 바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의 조용한 모습을 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집단의 생각’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라는 느낌이 든다면 바로 자신의 판단을 틀렸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질문 하나를 떠올려봐도 좋겠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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